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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오셀로

세계문학 도보기행- 2

<2010.02.07. 살롱드팩토리>

책 제목을 글의 제목으로 써놓고 민망하다.
그만큼 나는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고
책 내용과 관련하여 별다른 할 말이나 '끌림'을 못 느끼고 있다.
오셀로와 만난 어제는 심지어 졸기까지 했다.
잠을 좋아하고 늘 충분한 잠 속에서 살아가는 나는
공공의 장소, 더구나 공부하는 장소에서 조는 일은 좀처럼 드문일인데,
이상하게도 졸렸다. 이는 흥미 잃음에 대한 정신적  반응인지,
아니면 봄이 오고 있다는 신체의 나른함인지는 모르겠다. 
어찌하건 졸렸고,
졸리니 오가는 이야기들이 마치 환몽처럼 저편 세계에서 윙윙거렸다.
하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 느끼는 나의 모든 감정들은 
책,을 중심에 두고 빚어지는 것들이기에
굳이 책 제목을 글의 제목으로 쓴다.(낚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가만히, 독서와 관련한 나의 과거력을 돌이켜보면,
오셀로 처럼, 인용되는 횟수나 유명세에 비해 나에게는 오지 못하는  작품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대부분은 '나와는 안맞는' 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처박혀 다시 꺼내보지 않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제법 흘러 어느날 우연히 다른 형식으로 동일한 작품을 접하고는
크게 감동하고 전율하여 '내 생애 최고의' 라는 카테고리 안으로 급진적 자리 바꿈을 하게 된다.
이런 극단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생각하다보면,
그 어떤 시대적 상황적 이해없이 행해지는 관습적 책 읽기가 문제였던 것 같다.
내 안의 무지에 의한 오독, 은 아직도 되풀이 되고 있긴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자각은 하고 있기에 예전처럼 섣부른 판단은 안하게 된다.
대신, 가만히 끌어안고 있다가 다른 장소와 시간 속에서 그 의문이 풀리기를 기다린다.
우연히 그 때를 맞이하여 최절정의 쾌를 맛보길, 기대한다.
이번 도보기행에서 나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가만히 끌어안기'를 배우는 것 같다.
 
무척이나 유명하고 귀한 작품인데  나에게는 도통 와닿질 않다가 
뒤늦게 다른 매체(영화)로 만나 감동했던 작품들을 더듬거려 볼 때 
우선하여 떠오르는 작품은 [희랍인 조르바]와 [보이첵]이다.

지금 이 두 작품은 내 인생의 베스트가 되었다.
언제 어느 떄고 기꺼이 시간을 내서 다시 보고 싶고,
어느 누구에게겐  권해주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

그러한 변화는  
내 안에서 10여 년 넘게 묵혀져 있다가
어느날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어서 특별한 건지, 
거장 감독들의 해석이 덧붙여서 독해가 쉬워진 것인지,
문자 특유의  평면성이 이미지와 운동성 속에서 새롭게 살아난 건지,
기타 여러 환경적 요인들이 작용한 건지 ,
아니면 우리의 인식 너머 그 어떤 불가해한 요소들이 우연히 문득 개입된 결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나는 원전에 대한 좋은 해석을 만나 비로소 그 맛을 알았다,쪽으로 맘이 기운다.

더구나 보이첵은 오셀로 처럼 '극'을 위해 쓰여진 작품이라
단지 책으로만 접할 때는 그 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베르너 헤어조크와 클라우스 킨스키가 만나 만들어가는 보이첵은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무엇이? 라고 묻는다면
영화를 이루는 모든 것이. 
그 상영시간 80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두근거리는 시간이었다고,
구체성이 없는  덩어리같은 대답만 하게 된다 할 지라도
그 두근거림에 대한 감각적 체험만은 아직도 또렷하다.

그래서 나는 문학도보기행 커리큘럼에  소설이 아닌
 극작품 오셀로를 끼워 넣은 쌤의 의도가 있을 거라 여겼고
그것을 알고 싶었던 것인데, 내 의도가 선명하게 전달 된 것 같지는 않다.
아니면 그 의도를 이미 말했는데 내가 미처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깐 내 생각엔
단지 문자 텍스트로만 읽어 뭔가 이야기를 나누기엔
오셀로가 좀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욕심이 있다면
영화로 재해석된 오셀로를 병행하여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든다.



* 네이버 검색한 [보이첵] 시놉시스

7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된 바 있다. 당시 에바 메트가 여자연기상을 수상했다. 영화 <보이첵>은 희곡 <당통의 죽음/Dantons Tod, 1835>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19세기 독일 극작가 ‘게오르그 뷔히너’의 비극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군인 보이첵이 처해지는, 빈곤과 계급적 한계에 의해 짓눌린 억압적 상황과 그 종말을 다루고 있다. 보이첵은 그런 고통 속에서 이성을 상실하고 결국 사랑하는 여인 마리를 살해한다. 보이첵의 비극적 결말은 곧 독일 사회의 부조리성과 연결된다. 헤어조크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클라우스 킨스키가 보이첵 역을 연기했다.

*
보이첵을 영화를 보고 온 날, 나는 내 닉네임을  보이첵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렇다고  워낙에 오래 지녀온 랭보를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맘에만 지니고 있다가  네이버 카페에 가입할 일이 있길래 
보이첵이라 썼는데 이미 사용중인 아이디라 불가의 메시지가 떴다
그래서 보이첵 철자 중에서  'C' 빼고  'Woyzek' 을 아이디로 쓰고 있다.
내가 과연 저 영화를 봤나 의심하게 될 때  아이디를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그러니까가 'c'가 빠진 보이첵은 그 어떤 몰두에 대한 실존적 증거이기도 하다.

*
[희랍인 조르바]도 책으로 읽을 때는  [마초 조르바]에 다름 아닌 인물로 읽혔는데,
마이클 카코야니스 감독의 만든 영화를 만나며
[인간 의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 조르바]로 거듭났다.
그러면서 마초 조르바로 밖에 읽지 못해던 내 사고의 경직성에 크게  절망했었다.
또한 감독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의 작품들을 찾아 엄청 애썼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마침내  [검은 옷의 소녀]를 찾아내서 봤다. 그 성취감이란.......
시간과 함께 묻혀져 그 세부는 다 잊혀진다 해도 
몰두했던 그 감각만은  여전히 선명하고
그런 사소하고  분분한 기억들이 지금은 나를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
이요님, 어제는 나물먹는 곰에서 밥을 먹고 작업실에서 커피를 마셨어요.
좋은 공간 알려줘서 고마워요.
 





 


by 랭보 | 2010/02/08 09:11 | 자멸을 향하여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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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이요 at 2010/02/08 10:50
헉...이 긴 글 끝에 제 이름이...^^;;; 저도 '희랍인 조르바'를 10년쯤 일찍 만났더라면 그저 지루하고 재미없는 고전 소설 한편 읽었다고 치부하고 말았을 거예요. 늦게 만나서 좋았던 소설입니다.
Commented by 랭보 at 2010/02/08 12:03
긴 글을 자르고 있는데 덧이 달렸네요. ^^

Commented by mano at 2020/01/26 16:51
잘 봤습니다. 1월 30일 개봉하는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의 전기영화 <카잔자키스>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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